
식기세척기의 건조 성능을 가장 억울하게 평가하는 순간은 자동문이 열린 바로 그때입니다.
‘딸깍’ 소리가 나자마자 문 안으로 손을 넣습니다. 접시는 따뜻한데 플라스틱 밀폐용기에는 물방울이 맺혀 있습니다. 컵 바닥의 오목한 곳에는 작은 웅덩이까지 생겼습니다.
세척은 기계가 했지만 결국 행주를 가져와야 한다면 조금 속은 기분이 듭니다.
“자동문까지 열렸는데 왜 아직 젖어 있지?”
그런데 자동문이 열렸다는 것은 건조가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마지막 건조가 시작됐다는 신호에 가깝습니다.
안에 갇혀 있던 뜨겁고 습한 공기가 빠져나갈 길이 생긴 것이지, 문이 열리는 순간 모든 물방울이 마술처럼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문이 열린 순간
식기세척기는 제품에 따라 서로 다른 방법으로 그릇을 말립니다.
마지막 헹굼의 뜨거운 물로 식기를 데운 뒤 남은 열을 이용하기도 하고, 습한 공기가 상대적으로 차가운 내부 벽에 닿아 물방울로 변하도록 만들기도 합니다. 송풍이나 열풍을 사용하거나, 세척이 끝날 무렵 문을 조금 열어 습기를 밖으로 내보내는 제품도 있습니다.
자동문 열림은 이 과정의 일부입니다.
문이 열렸을 때 내부 벽과 식기에 물방울이 남아 있어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가고 식기에 남은 열이 물기를 더 증발시키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제품에 따라 자동문이 열린 뒤 한두 시간, 실내 온도와 습도에 따라 그보다 더 긴 자연 건조 시간을 안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자동문이 열렸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달려가 그릇을 꺼내기보다 잠시 그대로 두어보세요.
문이 열린 직후의 식기세척기는 시험이 끝난 학생이 아니라 아직 답안지를 쓰고 있는 학생에 가깝습니다. 채점은 조금 뒤에 해도 늦지 않습니다.
뜨거운 증기가 올라올 수 있으니 얼굴을 가까이 대거나 문을 갑자기 크게 열지는 마세요. 자동문이 열렸다면 다시 밀어 닫지 말고, 통행과 아이·반려동물의 안전에 문제가 없는 범위에서 자연스럽게 습기가 빠져나가도록 둡니다.
기다리는 동안 플라스틱에서 벌어지는 일
한참 뒤 다시 확인했는데 접시와 유리컵은 말랐고 플라스틱 용기만 젖어 있다면 건조장치의 고장부터 의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도자기와 유리는 마지막 헹굼에서 받은 열을 비교적 오래 간직합니다. 따뜻한 표면에서는 남아 있던 물이 계속 증발할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은 다릅니다.
대체로 가볍고 얇으며 열을 오래 품지 못합니다. 뜨거운 물이 지나간 뒤 빠르게 식어버리므로 표면의 물방울을 증발시킬 시간이 짧습니다.
같은 목욕탕에서 나왔는데 도자기는 두꺼운 가운을 입고 있고, 플라스틱은 얇은 셔츠 한 장만 걸친 셈입니다. 한쪽은 온기가 오래가고 다른 쪽은 금세 차가워집니다.
플라스틱 표면에서는 물이 얇게 퍼지기보다 동그란 방울로 모여 남기도 쉽습니다. 그래서 접시는 보송한데 밀폐용기 뚜껑에는 물방울이 또렷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차이를 모르고 플라스틱 하나만 꺼내 건조 성능을 판단하면 식기세척기가 조금 억울합니다.
식기세척기용 린스는 물이 표면에 둥글게 버티지 않고 얇게 퍼져 흘러내리도록 돕습니다. 린스 보충 표시가 켜져 있다면 전용 제품을 알맞게 채우는 것이 건조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린스를 많이 넣는다고 플라스틱이 도자기로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처음부터 설정을 가장 높게 올리기보다 기본값에서 시작해 결과를 보며 조절하는 편이 좋습니다.
물기는 말랐는데 유리잔에 흰 점이나 뿌연 자국만 남았다면 건조 불량과는 다른 문제일 수 있습니다.
그릇을 꺼낼 때 비가 한 번 더 내립니다
건조가 끝났는데도 컵 굽이나 국자에만 물이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물은 건조 기능이 부족해서라기보다 빠져나갈 길을 찾지 못한 물일 수 있습니다.
머그잔 바닥에는 작은 홈이 있습니다. 컵을 완전히 거꾸로 세우면 그 홈이 얕은 그릇처럼 변합니다. 국자와 큰 숟가락도 오목한 부분이 위를 향하면 물을 고이게 만드는 데 제법 충실합니다.
그릇을 넣을 때 아주 조금만 기울여도 물이 머물 자리가 줄어듭니다.
컵과 그릇의 입구는 아래로 향하게 하되 바닥의 홈에 물이 빠질 정도로 비스듬히 놓습니다. 국자와 큰 숟가락도 오목한 면이 아래쪽을 향하게 합니다. 플라스틱 용기는 물살에 뒤집히지 않도록 해당 제품이 권장하는 바구니나 지지대에 고정합니다.
식기끼리 포개지면 맞닿은 면에는 공기가 들어가기 어렵습니다. 그릇을 빈틈없이 채우는 솜씨보다 물과 공기가 지나갈 간격을 남기는 편이 건조에는 더 유리합니다.
꺼내는 순서도 작은 차이를 만듭니다.
상단 바구니의 컵과 용기에는 미처 빠지지 않은 물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위쪽 바구니부터 당기면 그 물이 아래 접시로 떨어집니다.
잘 말라 있던 접시가 위 선반의 마지막 소나기를 맞는 셈입니다.
하단 바구니의 식기부터 꺼낸 다음 상단 바구니를 비우면 이미 마른 식기가 다시 젖는 일을 줄일 수 있습니다.
충분히 기다렸는데도 모두 젖어 있다면
플라스틱 몇 개가 아니라 도자기와 유리까지 모두 흠뻑 젖어 있다면 그때는 사용한 코스와 설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급속이나 헹굼 전용처럼 건조 과정이 짧거나 제한된 코스가 있고, 추가 건조·고온 헹굼·열풍 건조를 별도로 선택해야 하는 제품도 있습니다. 같은 이름의 코스라도 작동 방식은 모델마다 다르므로 조작부에서 건조 옵션이 켜져 있었는지 확인해 보세요.
자동문 기능이 있는 제품인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면 선택한 코스가 자동문 열림을 지원하는지, 해당 기능이 꺼져 있지는 않은지 살펴봅니다. 문 앞의 발매트나 행주, 가구가 움직임을 막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동문이 열려야 하는 코스와 설정인데도 반복해서 닫힌 채로 끝난다면 손으로 문을 벌리거나 잠금 부분에 윤활제를 뿌리지 마세요. 이때는 문 작동장치의 점검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릇이 젖은 데다 차갑고, 세제나 음식물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면 단순한 건조 문제로만 보기도 어렵습니다. 물이 충분히 들어왔는지, 가열과 세척 과정이 정상적으로 진행됐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식기세척기 바닥에 탁하고 냄새나는 물이 많이 남거나 오류 표시와 누수가 함께 나타날 때도 건조 옵션을 바꿔 해결할 상황은 아닙니다.
내부에 헤어드라이어나 온풍기를 넣어 물기를 말리려 하지 마세요. 플라스틱을 무조건 열풍구 가까이 옮기는 것도 변형을 부를 수 있습니다.
식기세척기 문이 열리는 ‘딸깍’ 소리는 퇴근 종이 아닙니다.
닫힌 안쪽에서 이루어지던 건조가 바깥공기와 함께 마무리되는 순간입니다.
다음에는 문이 열리자마자 플라스틱 뚜껑부터 꺼내 채점하지 말고 조금 기다려보세요. 도자기와 유리는 마르고 플라스틱에만 몇 방울이 남았다면, 식기세척기가 일을 빼먹은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플라스틱이 그날의 온기를 조금 일찍 놓쳤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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