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 오는 저녁입니다.
방이 찜통처럼 덥지는 않은데 공기가 끈적거립니다. 소파도 눅눅한 것 같고, 괜히 팔에 먼지가 더 잘 붙는 기분도 듭니다.
리모컨을 들면 고민이 시작됩니다.
“냉방을 켜야 하나? 제습을 켜야 하나? 제습이 전기요금은 덜 나오겠지?”
내가 옆에 있다면 리모컨부터 보지 말고, 지금 무엇이 불편한지 먼저 보자고 말할 것 같습니다.
더워서 땀이 난다면 냉방입니다.
별로 덥지는 않은데 공기만 눅눅하다면 제습이 맞습니다.
생각보다 답은 단순합니다. 다만 여기서 많은 사람이 제습 버튼을 ‘절전 버튼’으로 오해합니다.
이름만 보면 그럴 만합니다. 냉방은 실외기를 열심히 돌릴 것 같고, 제습은 습기만 살짝 집어 들고 조용히 퇴근할 것 같으니까요.
하지만 에어컨은 제습을 선택했다고 갑자기 검소한 가전이 되지는 않습니다.
제습을 눌러도 실외기는 일을 합니다
공기 속 습기를 없애려면 먼저 공기를 차갑게 만들어야 합니다.
습한 공기가 차가운 에어컨 내부를 지나면 수분이 작은 물방울로 변합니다. 그 물이 배수호스를 통해 밖으로 빠져나가면서 방 안의 습도가 내려갑니다.
냉방 중 배수호스에서 물이 떨어지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냉방을 해도 온도만 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습기도 함께 줄어듭니다.
제습도 같은 장비를 사용합니다.
차이는 무엇을 우선하느냐에 있습니다.
냉방은 방의 온도를 빠르게 낮추는 데 힘을 씁니다. 제습은 찬바람의 세기와 실외기 운전을 조절하면서 습기를 줄이는 데 조금 더 신경을 씁니다.
완전히 다른 두 기능이라기보다 같은 도구를 들고 서로 다른 일을 맡은 셈입니다.
그래서 제습 중에도 찬바람이 나오고 실외기가 돌아갑니다. 고장이 아닙니다.
습기를 물로 바꾸려면 필요한 과정입니다.
지금 방이 덥다면 냉방부터 켜세요
한여름 오후처럼 방이 덥고 공기까지 눅눅하다면 냉방을 먼저 켜는 편이 낫습니다.
이런 날 제습만 켜두면 습도는 조금씩 내려가더라도 방이 시원해지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습니다. 실외기가 약하게 오래 일하면 냉방으로 빠르게 온도를 낮춘 경우보다 전기를 적게 썼다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이 땀을 흘리고 있는데 리모컨만 절약 정신으로 무장할 필요는 없습니다.
냉방으로 먼저 더위를 잡으세요.
방이 어느 정도 시원해졌는데도 공기가 끈적거린다면 그때 제습이나 자동·쾌적 운전을 사용하면 됩니다.
처음에는 강한 바람으로 방 안의 더운 공기를 움직이고, 시원해진 뒤에는 희망온도를 지나치게 낮추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찬 공기가 한쪽에만 머문다면 선풍기나 서큘레이터를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덥지는 않은데 눅눅하다면 제습이 맞습니다
장마철 저녁에는 온도보다 습기가 더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방에 들어왔는데 땀이 날 정도로 덥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불은 눅눅하고 바닥은 끈적이며 빨래에서는 마른 것 같으면서도 덜 마른 냄새가 납니다.
이럴 때는 제습을 켜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미 견딜 만한 온도인데 냉방으로 방을 더 차갑게 만들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습으로 습기를 줄이면 온도를 크게 내리지 않아도 공기가 한결 편안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다만 창문은 닫아야 합니다.
창문을 열어둔 채 제습을 하면 에어컨은 안에서 습기를 빼고, 창문은 밖에서 습기를 계속 들여보냅니다. 둘이 밤새 힘겨루기를 하는데 전기요금만 심판으로 불려 나오는 상황이 됩니다.
환기가 필요하다면 먼저 짧게 환기한 뒤 창문을 닫고 제습을 시작하는 편이 낫습니다.
잠잘 때는 새벽의 추위도 생각해야 합니다
저녁에는 괜찮았는데 새벽에 추워서 잠에서 깨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습은 찬바람이 약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습기를 제거하는 과정에는 냉각이 필요합니다. 방의 온도가 이미 낮아진 상태라면 제습 중에도 춥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냉방을 너무 낮게 설정해도 자는 동안 몸이 불편해집니다.
취침모드나 쾌면 기능이 있다면 활용해 보세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온도나 바람을 조절해 과도하게 추워지는 것을 줄여주는 기능입니다.
다만 제품마다 작동 방식이 다릅니다. 어떤 제품은 제습 중 온도를 바꿀 수 있고, 어떤 제품은 알아서 운전합니다.
리모컨에서 온도 조절이 되지 않는다고 고장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제품의 제습 방식이 원래 그런 것일 수 있습니다.
전기요금은 버튼 이름보다 운전시간을 봅니다
같은 에어컨을 같은 시간 동안 켜도 소비전력은 매번 달라질 수 있습니다.
바깥 기온, 햇빛, 방의 크기, 단열 상태, 문을 여닫은 횟수, 설정온도에 따라 실외기가 일하는 시간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필터에 먼지가 많이 쌓여 공기가 잘 통하지 않아도 에어컨은 원하는 온도에 도달하기 위해 더 오래 움직일 수 있습니다.
결국 전기요금을 결정하는 것은 리모컨에 적힌 ‘냉방’과 ‘제습’이라는 글자보다 실외기가 얼마나 강하게, 얼마나 오래 일했는가에 가깝습니다.
인터넷에서 “제습으로 바꾸니 전기요금이 절반으로 줄었다”거나 “제습과 냉방은 전기요금이 똑같다”는 말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어떤 집에서는 맞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집의 정답은 아닙니다.
에어컨 모델도 다르고, 방의 크기도 다르며, 사용한 날의 기온과 습도도 다릅니다. 남의 집 전기요금 고지서는 참고자료이지 우리 집 사용설명서는 아닙니다.
우리 집 에어컨은 직접 비교할 수 있습니다
에어컨 앱에서 전력사용량을 보여주는 제품이라면 냉방과 제습을 비슷한 조건에서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사용시간과 희망온도를 비슷하게 맞추고, 날씨가 비슷한 날의 소비전력을 살펴보세요.
하루만 비교하고 답을 내리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은 햇볕이 강하고, 어느 날은 가족이 문을 열고 나간 횟수가 많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사용해 보면 우리 집에서는 어떤 운전이 더 편하고, 어느 쪽이 오래 작동하는지 대략적인 차이가 보입니다.
앱에 전력 확인 기능이 없다면 굳이 측정기부터 살 필요는 없습니다.
작은 온습도계가 있다면 방의 상태를 판단하는 데 도움은 됩니다. 숫자를 절대적인 정답으로 볼 필요는 없지만, 지금 불편한 이유가 더위인지 습기인지 구분하기는 쉬워집니다.
그리고 다음 세 가지만 기억하면 됩니다.
방이 덥고 습하다면 냉방부터 켭니다.
온도는 괜찮고 공기만 눅눅하다면 제습을 켭니다.
빨래나 옷방처럼 습기를 없애는 일 자체가 목적이라면 에어컨보다 제습기가 알맞을 수 있습니다.
제습은 절전 버튼이 아니라 상황 버튼입니다
제습모드가 전기를 덜 쓰는 경우는 있습니다.
하지만 제습을 눌렀다는 이유만으로 전기요금이 반드시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방이 매우 더운지, 습기만 많은지, 에어컨이 얼마나 오래 작동했는지를 함께 봐야 합니다.
그러니 리모컨 앞에서 너무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금 더운가, 눅눅한가?”
먼저 이것만 생각해 보세요.
더우면 냉방.
눅눅하면 제습.
둘 다 심하면 냉방부터.
제습모드는 전기를 마구 먹는 악당도 아니고, 요금 고지서를 구해주는 비밀 영웅도 아닙니다.
필요한 날 제 역할을 하는 버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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