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후 햇빛이 베란다 바닥을 밀고 들어오면 실외기 외함이 희게 번쩍입니다.
손을 대지 않아도 뜨거워 보입니다. 그 위에 은박 그늘막 하나만 올려두면 에어컨도 덜 지치고 전기요금도 조금 얌전해질 것 같은 생각이 들지요.
충분히 그럴듯합니다.
사람도 볕을 피해 그늘로 들어가면 한결 시원해지니까요.
하지만 실외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겉판을 조금 식힌다고 곧바로 냉방 능력이 좋아지는 구조도 아닙니다. 이 기계가 더 다급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그늘보다 뜨거운 공기가 빠져나갈 자리입니다.
은박 덮개는 보기만 해도 성실하게 절약할 것 같지만, 전기요금은 반짝임에 쉽게 설득되지 않습니다.
실외기는 집 안의 열을 밖으로 옮깁니다
에어컨을 켜면 실내기에서 찬바람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방 안의 열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냉매가 그 열을 품고 실외기로 옮긴 뒤, 실외기 팬이 바깥공기 속으로 밀어냅니다.
실외기 앞에서 후끈한 바람이 느껴지는 까닭입니다.
이 일을 계속하려면 실외기는 주변 공기를 넉넉히 빨아들이고, 뜨거워진 공기를 멀리 내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앞에 상자가 쌓여 있거나 환기창이 닫혀 있으면 막 내보낸 열기가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뜨거운 공기가 벽이나 덮개에 부딪혀 다시 실외기 쪽으로 돌아오기도 하지요.
이때 실외기가 받아들이는 공기의 온도가 높아집니다. 압축기는 같은 냉방을 만들기 위해 더 오래 움직이고, 방은 좀처럼 시원해지지 않습니다.
실외기 외함의 표면 온도와 실외기가 빨아들이는 공기의 온도는 같은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늘막이 겉판의 뜨거움을 줄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옆 공기까지 넓게 식혀주지는 못합니다. 더구나 차양이 바람길을 조금이라도 좁히면, 얻은 것보다 잃는 것이 커질 수 있습니다.
연구에서는 절감 폭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습니다
미국 플로리다 태양에너지센터는 서쪽 햇빛을 받는 세 가정의 실외기에 나무와 조경, 목재 차양을 설치했습니다.
두 차례 여름 동안 차양 설치 전후의 온도와 에어컨 전력 사용량을 비교했지요. 공기 흐름을 가급적 방해하지 않도록 세심하게 설치한 실험이었습니다.
세 곳의 평균 절감치는 약 0.1%였습니다. 측정 불확실성이 ±2%였기 때문에, 그늘이 전력 사용량을 꾸준히 줄였다고 통계적으로 확인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연구진이 본 국소 차양의 절감 가능성은 대체로 3% 미만이었습니다. 가까이에 심은 나무나 구조물이 공기 흐름을 막으면 그 작은 이점마저 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2010년 쿠웨이트 과학연구소 연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습니다.
공기의 흐름은 전혀 막지 않고 햇빛만 완벽하게 가리는 ‘이상적인 그늘’을 가정했을 때조차 이론적인 성능 향상은 2.5% 이내였습니다. 실제 향상은 1%를 넘기기 어렵고, 하루 전체의 에너지 절감 폭은 그보다 작을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물론 이 연구들이 한국 아파트의 실외기실이나 요즘의 모든 인버터 에어컨을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닙니다. 기후와 제품 구조, 설치 방향이 다르니 숫자를 우리 집 전기요금에 그대로 대입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작은 그늘막 하나로 전력 사용량이 10%나 20% 줄어든다는 주장을 일반적인 사실로 받아들일 근거는 부족합니다.
그렇다고 그늘막이 쓸모없는 물건은 아닙니다
실외기가 건물 밖에 완전히 노출되어 있고, 오후 내내 강한 직사광선을 받는다면 차양은 외함의 표면 온도를 낮추는 데 어느 정도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햇빛과 낙하물에 외함이 직접 노출되는 시간을 줄이는 보조 장치로도 생각할 수 있지요.
다만 목적을 정확히 잡아야 합니다.
그늘막은 전기요금을 크게 낮추는 절전장치라기보다, 설치 환경을 조금 보완하는 부속물에 가깝습니다.
그늘을 얻는 대신 감수해야 할 것도 있습니다.
차양이 실외기에 너무 가까우면 뜨거운 바람이 위나 앞으로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비닐과 천은 끈이 느슨해졌을 때 팬이나 송풍구 쪽으로 말려들 수 있습니다. 가벼운 덮개는 태풍과 돌풍에 날아가 아래층이나 보행 공간으로 떨어질 위험도 있습니다.
본체에 직접 나사를 박거나 임의로 구멍을 내는 일도 피해야 합니다. 고정이 필요하다면 실외기와 따로 서는 구조인지, 바람을 받아도 흔들리지 않는지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늘막의 넓이보다 설치 뒤에도 공기가 자유롭게 드나드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실외기실에서는 차양보다 루버가 먼저입니다
아파트 실외기실 문을 열었을 때 후끈한 공기가 얼굴에 닿는다면, 그늘막을 주문하기 전에 환기창부터 봐야 합니다.
루버 날개가 반쯤 닫혀 있거나 방충망에 회색 먼지가 촘촘히 붙어 있지 않은지 확인해 보세요. 실외기 앞에 여행 가방과 택배 상자, 화분이 놓여 있는 집도 적지 않습니다.
이 물건들은 조용히 서 있을 뿐이지만, 실외기 바람에는 꽤 단단한 벽이 됩니다.
환기창의 날개는 뜨거운 바람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가기 쉬운 방향으로 충분히 엽니다. 방충망에 먼지가 쌓였다면 전원을 끈 상태에서 접근 가능한 부분만 안전하게 청소하세요.
실외기 전면과 뒤편의 물건도 치웁니다. 빨래나 커튼 자락이 송풍구 가까이 흔들리지 않는지도 봐야 합니다.
실외기가 환기창보다 지나치게 낮거나 멀리 떨어져 열기가 밖으로 빠지지 않는 구조라면, 임의로 받침대를 괴기보다 설치 기사에게 에어가이드가 필요한지 물어보는 편이 안전합니다.
실외기실 안은 이미 햇빛이 어느 정도 가려진 공간입니다. 이곳에서 별도의 그늘막을 더 씌우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작고, 공기 흐름을 좁힐 가능성만 커집니다.
밖에 노출된 실외기라면 바람의 방향을 보세요
실외기마다 공기를 빨아들이는 면과 뜨거운 바람을 내보내는 면이 다릅니다.
앞쪽으로 바람을 보내는 제품도 있고 위쪽으로 내보내는 제품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본 차양의 높이와 간격을 우리 집 실외기에 그대로 적용하면 곤란합니다.
그늘막을 고려한다면 먼저 에어컨을 가동했을 때 뜨거운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나가는지 멀리서 확인합니다. 손이나 물건을 팬 가까이 대서는 안 됩니다.
차양은 그 바람길을 덮거나 꺾지 않아야 합니다.
실외기 위에 밀착되는 덮개보다는 본체와 떨어져 햇빛만 가리는 고정식 차양이 낫습니다. 그래도 제품 설명서에 적힌 위쪽·앞쪽·옆쪽 이격거리가 우선입니다. 모든 실외기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한 가지 숫자는 없습니다.
고층 외벽이나 난간 바깥에 설치된 실외기는 직접 손보지 마세요.
몸을 내밀어 끈을 묶거나 덮개를 고치다가 균형을 잃을 수 있습니다. 그늘을 조금 만들려다 사람이 먼저 아찔해질 이유는 없습니다. 접근이 어려운 위치라면 관리사무소나 설치 기사에게 맡기는 것이 맞습니다.
그늘막으로 해결할 수 없는 신호도 있습니다
햇볕을 많이 받는 날 실외기 외함이 따뜻하거나 뜨거운 바람이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반면 평소와 다른 큰 진동이 이어지거나 금속 긁는 소리가 나고, 타는 냄새가 느껴지거나 차단기가 반복해서 내려간다면 차양을 달 때가 아닙니다.
에어컨을 멈추고 전원 상태와 실외기를 점검받아야 합니다.
낙엽과 비닐, 종이 상자처럼 불이 붙을 수 있는 물건이 실외기 주변에 쌓여 있다면 바로 치워주세요. 실외기의 뜨거운 바람이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문제는 냉방 성능에서 끝나지 않고 과열과 고장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에어컨을 켰는데 방이 시원해지지 않는다면 그늘막부터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닫힌 환기창, 막힌 필터, 실외기 주변의 장애물처럼 더 흔한 원인이 있습니다.
전기요금을 아끼고 싶다면 공기가 드나드는 길부터
실외기 그늘막을 사기 전에 실외기 앞에 서서 주변을 한 번 봐주세요.
환기창이 충분히 열려 있는지, 방충망이 먼지로 막히지 않았는지, 뜨거운 바람이 벽에 부딪혀 다시 돌아오지는 않는지 확인합니다. 상자와 화분을 치우는 일은 화려하지 않지만, 실외기가 원래 하던 일을 제대로 하게 만듭니다.
실내에서는 필터의 먼지를 씻고, 커튼이나 블라인드로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빛을 줄이는 편이 냉방 부담을 낮추는 데 더 직접적입니다.
그늘막을 설치할 이유가 남아 있다면 그다음에 고르면 됩니다.
햇빛은 가리되 바람은 가리지 않을 것.
실외기 본체에 밀착시키거나 임의로 구멍을 내지 않을 것.
강풍에도 떨어지거나 펄럭이지 않도록 안전하게 고정할 것.
그리고 제품별 설치 설명서에 적힌 공간을 남길 것.
실외기 위의 금속판이 조금 덜 뜨거워지는 일보다, 실내에서 가져온 열이 막힘없이 바깥으로 떠나는 일이 먼저입니다.
그늘막을 달기 전에 환기창부터 여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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